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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쩔수가없다’ 후기 (첼로 그림 악보, 박찬욱의 미장센, ai와 인간 소외)

by Mr. Kim__ 2025.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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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2025)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한 개인의 파국을 통해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불안과 인간 소외, 그리고 그 이면에 자리한 윤리적 붕괴를 집요하게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겉으로는 가장의 몰락을 다룬 심리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기계화된 사회의 구조적 폭력, 기술 발전에 의한 인간의 대체 가능성, 그리고 인간 고유의 가치가 어떻게 소외되는지를 다층적으로 담아냅니다.

 

특히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 속에서 새롭게 창조된 캐릭터인 만수(이병헌)와 미리(손예진)의 딸 리원(최소율)이는 이 서사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축으로, 그녀의 존재와 ‘그림 악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응축한 장치로 기능합니다. 이 글에서는 리원이의 상징성, 영화의 미장센, 그리고 기계화된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라는 세 가지 주제를 통해 영화가 던지는 질문과 의미를 차분하게 짚어보려 합니다.


1. 자폐 스펙트럼 예언자: 리원이

미리(손예진)의 딸 리원(최소율)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주인공 만수(이병헌)가 자기 합리화와 폭력의 연속으로 파국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서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만수의 딸, 리원이입니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첼리스트 리원이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관통하는 중요한 '예언자'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글의 첫 번째 이야기로, 리원이 캐릭터와 그녀의 독특한 '그림 악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만수의 딸 리원: 파국을 암시하는 '현대판 카산드라'

박찬욱 감독이 원작을 넘어 새롭게 창조한 캐릭터 '리원'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에서 리원이 캐릭터를 고대 신화 속 예언자 '카산드라'에 비유했다고 밝혔습니다. 리원이는 원작 소설인 '액스(The Ax)'에는 없던 캐릭터로, 감독이 영화의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새롭게 창조한 인물입니다.

  • 진실을 아는 자: 리원이는 남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려 하지 않는 진실을 인식합니다. 그녀가 후반부에 내뱉는 "뿌리부터 썩어버렸어"라는 대사는 주인공 만수 가족이 직면한 상황을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 고립된 메시지: 카산드라가 트로이의 멸망을 예언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듯, 리원이의 경고와 독특한 표현 방식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단순한 이상 행동으로 취급됩니다. 이는 진실이 외면당하는 가족의 단절을 상징합니다.

오선지를 거부한 '그림 악보'의 의미

리원이가 그리는 첼로 그림 악보

영화에서 만수의 딸 리원이가 첼로 연주를 위해 사용하는 악보는 전통적인 오선지 위의 기보법이 아닙니다. 그녀는 하얀 종이에 색과 도형을 이용해 음악을 기호화한 독창적인 '그림 악보'를 사용합니다. 실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18살 소녀 첼리스트 이정현 양의 악보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이 그림 악보가 영화에서 갖는 메시지는 매우 강력합니다.

  • 획일화에 대한 저항: 오선지와 음자리표를 사용하는 대신, 리원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표현합니다. 이는 세상의 규격화된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 순수한 천재성: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리원이의 모습은 주류 시스템 밖에서도 인간 고유의 창의성과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자기합리화에 묻힌 윤리적 책임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는 바로 '어쩔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영화에서 자신만의 그림 악보를 통해 첼로를 연주하는 리원이는 자신의 방식으로 생명력을 유지하는 어둠 속의 빛과 같은 존재입니다. 만수가 자신의 폭력을 환경 탓, 운명 탓으로 돌리며 '어쩔 수가 없다'고 되뇌일 때, 리원이는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는 증인으로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과연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 변명 뒤에 윤리적 책임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화 후반부에서 리원이의 첼로 선율은 파국을 향해 가는 만수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우리 사회에 던지는 성찰의 외침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2. 영화 '어쩔수가없다' 미장센

박찬욱 감독은 시각적인 연출, 즉 미장센(Mise-en-scène)을 통해 캐릭터의 심리와 영화의 주제를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도 만수의 불안과 가족의 파국을 극대화하는 미장센이 사용됩니다.


공간의 미장센: 기계화와 소외

영화의 주요 배경인 만수의 작업 공간과 주거 환경은 기계화된 사회의 냉혹함을 상징합니다.

  • 차가운 색감과 직선: 공장과 주택은 차가운 색과 직선 구조로 표현되며, 효율성과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사회를 시각화합니다. 만수의 불안과 소외감을 공간이 대신 전달합니다.
  • 협소한 프레임: 만수가 프레임 안에 갇히거나 좁은 시야로 표현되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심리적 굴레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리원이와 '그림 악보'의 미장센: 유일한 온기

리원이가 연주하는 장면이나 그녀의 '그림 악보'가 등장할 때의 미장센은 차가운 현실과의 강렬한 대비를 이룹니다.

  • 따뜻한 색채: 리원이가 그린 '그림 악보'는 흰 종이에 색과 도형이 그려진 추상적인 형태입니다. 이 악보의 비규격적인 따뜻한 색채와 유동적인 형태는 만수를 둘러싼 차가운 기계 문명과의 대립점을 형성합니다. 그녀의 예술은 인간 고유의 감정과 생명력이 남아있는 유일한 영역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 첼로 연주: 영화 후반의 첼로 연주 장면에서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옅은 빛은 그녀의 음악이 가족의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발하는 온기처럼 전달됩니다.

미장센의 변화: 파국으로의 하강

영화는 만수의 자기 합리화와 폭력이 심해질수록 미장센의 분위기가 더욱 어둡고 비극적으로 변합니다.

  • 혼란스러운 구도: 가족의 갈등 장면에서 불안정한 카메라 구도는 관계 해체를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 소품의 상징성: 가구나 주변 소품의 훼손 상태는 만수의 외면 속에서 가족 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러한 미장센을 통해 '어쩔 수가 없다'는 변명 뒤에 숨은 만수의 내적 황폐함을 외부 환경에 투사하고, 리원이를 통해 인간성의 마지막 저항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3. 기계화된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와 불안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한 가족의 비극을 넘어, AI와 기계화가 주도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와 노동력이 어떻게 소외되고 대체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강력한 풍자를 녹여낸 블랙코미디 스릴러 작품입니다.

만수의 불안: '대체 불가능성'의 상실

만수(이병헌)는 영화 초반에 스스로를 '숙련된 기술자'이자 '대체 불가능한 노동력'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기술 발전은 그의 이러한 믿음을 근본부터 흔듭니다.

  • 노동력의 상품화: 만수는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기술자라고 믿지만, 기계와 AI의 발전은 그 믿음을 흔듭니다. 그는 자신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립니다.
  • 자기 합리화: 이 불안은 만수가 폭력적인 행동을 '나는 어쩔 수 없는 희생양이다'라고 합리화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리원이와 '그림 악보': 비표준적 가치

리원이 캐릭터와 그녀의 '그림 악보'는 이 기계화된 시스템이 배제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비효율성의 가치: 기계는 규격화된 데이터만 인정하지만, 리원이가 사용하는 색과 도형으로 이루어진 '그림 악보'는 시스템의 기준에서 벗어난, 지극히 비표준적이고 비효율적인 형태입니다.
  • 인간 고유의 영역: 첼로 연주는 인간의 감정과 영혼이라는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을 상징하며, 사회가 인간 고유의 독창성을 소외시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본주의적 합리화와 인간성의 파괴

결국 영화는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극한의 합리화와 효율성이 어떻게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기반을 파괴하는지 보여줍니다.

  • '어쩔 수가 없다'는 자기합리화: 만수의 변명은 결과와 효율만을 중시하며, 인간의 윤리적 선택을 배제합니다. 그는 인간이 가진 윤리적 선택의 영역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시스템의 불가피한 결과로 돌리려 합니다.
  • 시스템의 희생자: 만수는 스스로 시스템의 피해자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폭력적 행동을 선택하며 시스템의 논리 안에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단순한 가족 비극이 아니라, 기계 문명이 인간의 가치를 위협할 때, 인간이 내면의 불안과 폭력으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박찬욱 감독의 사회 풍자입니다. 영화 속 리원이의 첼로 소리는 그 차가운 기계 소리 속에서 울리는 대체 불가능한 인간의 소리이자 경고입니다.


마무리

결국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만수라는 개인의 파국을 통해 냉혹한 현대사회와 개인의 윤리 붕괴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가치를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지를 묻는 영화입니다. 만수가 차가운 현실 앞에 자기합리화로 타락해 가는 모습에 반해, 리원이의 ‘그림 악보’와 첼로 소리는 또렷하게 인간성을 환기하는 대비점으로 빛을 냅니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흐르는 리원이의 첼로 연주는, 우리가 ‘어쩔 수가 없다’는 말 뒤에 얼마나 많은 책임과 선택의 기회를 숨기며 자기합리화를 통해 살아가는지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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