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별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위에 소제목은 사실,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 한 말이다. 우선, 저 말의 주인부터 밝히자면, 바로 유시민 작가이다. '노무현재단 이사장', '전 장관' 등 다른 호칭도 많지만, 이 글은 정치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작가'라는 호칭이 적절한 것 같다. 아마도 이 글은 위에 있는 소제목에 충실한 글이 될 것 같다.
유시민 작가는 올 초에 한 방송사에서 개최한 신년토론회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었다. 바로 직전까지 같은 길을 걸었던 진중권 전 교수가 정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으로 곤란한 상황을 겪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곤란한 상황은 진 교수가 일방적으로 유시민 작가에게 적나라한 비난을 쏟아부음으로써 발생했다.
유시민 작가는 그동안 보여준 토론 모습과는 달리, 날 선 논박을 가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토론을 보아왔다. 날카로운 칼을 휘둘러대는 상대를 그냥 되돌려 보내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날 만큼은 상대의 칼을 피하기만 할 뿐, 그냥 돌려보냈다. 이 토론 이후, 유 작가를 향한 예상된 질문은 예상대로 쏟아졌다.
▶ '왜 제대로 논박하지 않고 받아주기만 했나?'
사랑의 기술 못지않게 이별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유 작가는 우리 주변에는 작별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생기는 비극이 많다고 했다.
▶ 유시민 작가 :
진 교수와는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부터 진 교수와는 판단이 일치했던 때도 있었지만, 달랐던 때도 있었다(실제로 진중권 교수는 유시민 작가가 몸담았던 '참여정부'를 향해 신랄한 비판을 하기도 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유 작가와 함께 뜻을 모으기도 했다). 그래서 국면마다 가끔 함께 길을 걸었던 사이인데, 지금은 진 교수가 정반대의 길을 가기로 작심한 듯 보인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작별의 기술이다. 서로 동질감을 느끼거나, 세상을 보는 눈이 비슷하다거나, 뜻이 같아서 어떤 일을 함께 도모했거나, 이렇게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과 다음 갈림길에서 갈라서게 될 때는 최대한 존중하면서 작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 시기를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며 살았다가, 어느 한쪽이 변했던, 둘 다 변했던, 다른 특별한 상황이 있었든 간에, 더는 함께 살 수 없게 되는, 같은 길을 갈 수 없게 되는 때가 올 수도 있다. 그러면 그때 서로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으면서 서로 간에 묵었던 감정들을 다 들추어내고, 서로에게 뭔가를 다 집어 던지고 뒤돌아서는 것은 좋지 않다. 또 어딘가에서 만나 같이 갈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 일이라는 게 알 수 없는 것인데. 그래서 작별을 할 때는 되도록 좋게 작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글의 제목처럼, 내가 본 최고의 해피엔딩 영화로 《봄날은 간다》를 꼽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작별의 기술'과 '좋은 헤어짐'. 남녀 관계도 본질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따라서 이 역시도 '작별의 기술'이 필요하고, 관계를 끝내는 '헤어짐'의 순간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은 명작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매력을 생각나는 순으로 꼽아본다. 첫째는 유지태, 이영애 두 명배우의 풋풋했던 시절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90년대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는 예쁜 화면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만들어진 한국영화 보는 것을 즐긴다. 위에 사진과 같은 장면에서 느껴지는 '옛날 감성' 때문인데, 요즘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희소성 때문인지 유독 저런 화면에 마음이 끌린다.
위에서 두 번째 장면은 유지태가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장면인데,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이다. 사실, 영화 속에서 저 상황은 유지태가 큰 소리로 발악하듯 노래를 부르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표현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유지태의 연기 못지않게, 그 뒤로 보이는 배경과 사물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해 보인다. 유지태의 손에 들린 것은 90년 중반까지-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흔히 볼 수 있었던 '대중가요 악보 모음집'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뒤로 보이는 기와지붕과 장독대 위로 떨어져 튕겨 나가는 빗물 모습이 압권이다.
그리고 위에 보이는 장면은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이다. 슬레이트 지붕 끝자락에서 흘러내리는 빗물과 귀를 감질나게 하는 빗물 소리. 크고 투박해 보이는 유리 창문과 창문이 열려진 공간 너머로 보이는 두 사람. 눈과 귀를 동시에 감상에 젖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세 번째 매력은, 옛날식 연출이다. 영화 전문가가 아니기에 이런 연출 방식을 어떻게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설명하자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하는 듯한, 복선을 까는 연출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의 단편 문학에서 자주 접했던 표현 방식인데 그와 유사한 느낌이었다. 그 밖에 카메라를 통한 시선 이동도 요즘 영상물에는 찾아볼 수 없는 '예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지막, 네 번째 매력은 음악이다. 중간중간마다 나오는 음악들은 영화 장면과 너무나도 잘 들어맞는다. 삽입된 음악은 영화를 보는 내내 몰입감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잡아두는 역할을 했고, 때로는 영화 속 인물의 호흡에 따라가게 하기도 했다.
특히, 영화 마지막 장면에 흘러나오는 먹먹한 느낌의 음악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까지 몸을 잡아 두었다. 그리고 뒤이어 흘러나온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는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을 잊게 했다.
▶ 내가 본 최고의 해피엔딩 영화 <봄날은 간다>
그렇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내가 본 최고의 해피엔딩 영화이다. 이 영화가 '해피엔딩'인 이유는 '좋은 헤어짐'에 있다. 사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필자에게 쓰라린 추억이 깃들어 있는 영화다. 아마도 당시의 필자에게는 '작별이 기술'이 없었던 탓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영화의 주인공 유지태('상우' 역)와 이영애('은수' 역)는 특별한 것 없는 만남과 특별할 것 없는 다툼으로 '처음'과 '끝'을 만들어간다. 극 중에서 둘은 뜬금없는 라면 취식이 계기가 되어 관계가 무르익게 된다.
"라면 먹을래요?"
많은 사람의 밤을 뜨겁게 했던 바로 그 명대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명대사, "라면 먹고 갈래?"는 바로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대사는 "라면 먹을래요?"이다.
하여튼 라면 취식이 계기가 되어 만남이 이어지고, 다시 특별할 것 없는 다툼으로 멀어진다. 이후부터의 상황은 주위에 흔한 스토리와 큰 차이가 없다. 한쪽은 밀어내고, 한쪽은 밀어낸 만큼의 공백을 메우려 애쓴다.
언제나 그렇듯 남녀 관계라는 것이 참 묘하다. 서로를 끌어당기다가도, 언제부터는 한쪽은 밀어내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당긴다. 그러다 또 언젠가부터는 밀고 당기는 역할이 서로 바뀌는 때도 있다. 이 영화도 그렇다. 그러나 영화 속 남녀의 끝은 아프지만, 아름답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는 여자가 준 선물을 다시 되돌려줬다. 여자는 잠시 고개를 떨궜지만, 이내 웃으며 끄덕였다. 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
"어... 잘 가."
여자는 돌아서 걸어가는 남자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남자에게 뛰어간다. 여자는 남자의 옷매무새를 만져주고는 악수를 청했다. 둘은 웃으며 손을 맞잡았고 그게 끝이었다. 여자는 뒤돌아 걸었고 점점 멀어졌다.
남자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고, 여자는 몇 번이고 뒤돌아봤다. 그러다 서로를 뒤돌아보게 되고 눈이 마주친다.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이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몰입했던 순간이 아닌가 싶다. '좋은 헤어짐'이었다. 감정이 말끔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서로가 수긍했고 작별을 인정했다.
당시 필자가 흉내 내기에는 너무 어린 시절이었고, 따라 하기에는 너무 성숙한 작별이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작별의 기술'이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두 남녀가 너무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해서 영화 《봄날은 간다》는 내가 본 최고의 해피엔딩 영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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