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초, 서울 구치소에서 수감 생활 중인 누군가가 쓴 편지가 국회에서 공개됐다.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한 후, 일부 혐의가 인정되어 구치소에 수용된 채, 나머지 혐의에 대해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쓴 편지가 국회에서 공개된 것이다.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사건이다. 편지의 내용도 그렇고, 이 편지를 취급하는 각 정치집단의 태도들도 이채롭다. 일단, 편지 내용을 들여다본다. "국민 여러분 박근혜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편지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나라 걱정'
둘째, '현 정부 비난'
셋째, '태극기 들었던 국민들 모여라'
구치소 수감자가 쓴 편지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태연하다. 마치 정상적으로 퇴임한 대통령이 자택에서 전달하는 정치 메시지처럼 보인다. 어쩌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파트너인 최순실 아니, 최서원 씨도 마찬가지로 나름의 나라 걱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구치소에 수용되어 있어도 박 전 대통령의 '나라 사랑'은 남달랐다. "북한의 핵 위협과 우방국들과의 관계 악화는 나라 미래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기에 구치소에 있으면서도 걱정 많았습니다."라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전했다. 마음은 알겠는데, 내용 중에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북핵 문제'는 김정은-트럼프의 '이색적 케미'로 긴 시간 동안 멈춰있는 상황이고, '우방국들과의 관계 악화'는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치 않다. 최근, 관계가 악화한 주변국은 일본뿐인데, 일본과의 관계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그렇다면 더욱 문제가 된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시작된 한일관계 악화일로의 출발점은 박근혜 정부에 있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얘기가 너무 길어지므로, 아래에 관련 링크를 남기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 일본의 무역 보복 전개과정 요약 정리. 일본이 한국에 수출 규제하는 이유.
서울 구치소에서 작성된 이 편지는, 현 정부를 "무능하고 위선적이며 독선적인 집권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많은 분들이" 현 정부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 "많은 분들"의 평가를 인용했다. 그러면서 태극기 세력의 결집을 주문했다.
박 전 대통령은 편지 말미에 "태극기를 들었던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주실 것을 호소드립니다."라며 자신의 탄핵을 반대했던 지지층의 결집을 북돋우며 편지를 마무리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서 태극기 세력 결집을 호소하는 이 편지는 명백한 정치 메시지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아직도 자신이 탄핵당한 대통령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일말의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모두에 언급했듯이, 이 편지를 취급하는 각 정치집단들의 태도가 제각각인 것이 또한 흥미롭다.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등의 민주·진보계열 정당은 국회에서 편지가 공개되자마자 일제히 비판 성명을 냈다. 이들의 비판은 누구나 짐작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특별할 것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보수계열 정당들의 리액션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에 환영 성명을 낸 정당은 미래통합당, 자유공화당, 친박신당 등이다. 친박신당은 대표적 친박 인사인 홍문종 의원이 대표로 있는 정당이다. 홍문종 의원의 '박근혜 사랑'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극성이다. 지난해 10월, 문재인 대통령 모친상 빈소를 찾아간 홍 의원은 부적절한 '박근혜 사랑'을 과시해 논란이 됐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는 가족들과 차분하게 치를 예정이며 조문과 조화는 정중히 사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빈소에는 일부 종교계 인사들이 방문했고 차분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문 대통령 모친상 빈소를 찾은 홍 의원은 그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면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져 많은 논란이 됐다.
다른 자리도 아닌 빈소였고, 조문을 정중히 사양한다는 뜻을 미리 밝혔음에도 기어이 찾아갔다. 그리고 대통령 앞에서 "우리 대통령 많이 아프신데 배려 좀 해달라"는 말을 내뱉은 것을 보면 '박근혜 사랑'이 얼마나 극성인지 알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편지에 환영 성명을 낸 또 다른 정당은 자유공화당이다. 자유공화당은 김문수 전 의원이 대표였던 자유통일당과 조원진 의원이 대표였던 우리공화당이 합쳐진 정당이다. 김문수, 조원진 두 인사가 공동대표로 있는 자유공화당은, 대표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박근혜 정치세력'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박근혜'라는 심장으로 사지를 움직이는 '친박신당', '자유공화당' 두 정당은 '박근혜 옥중서신'이 공개되자 앞다투어 찬양 일색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도 고민이 깊다. 하나로 모여달라는 '심장'의 뜻을 거역해야 할 판이다. 고개 숙이고 미래통합당으로 들어가자니, 공천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 제 갈 길을 가자니, '심장'의 명을 거스르는 셈이라 숨을 쉴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마지막으로 미래통합당의 반응이 가장 볼만하다. 미래통합당은 '탄핵의 강을 건너(탄핵을 인정하고 극복하자)'고 개혁·보수를 표방하자던 '새로운보수당(유승민 등 '바른미래당' 일부가 창당)'과 '자유한국당'이 합쳐진 정당이다. 새로운보수당은 자유한국당에 '탄핵 인정'을 합당의 조건으로 내세웠다.
두 정당이 합당은 했으나, 새로운보수당이 내세운 '탄핵 인정'이라는 조건은 어떻게 반영됐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이 조건이 스리슬쩍 넘어가는 사이에 유승민과 그 측근들은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볼 수 없게 됐을 뿐만 아니라, 미래통합당 대구시당 재보선 공천에서도 대거 탈락했다.
'박근혜 탄핵 무효'를 외치던 '태극기 부대'가 지명한 '탄핵 5적'도 이번 선거에서 볼 수 없게 됐다. '태극기 부대'는 김무성, 유승민, 홍준표, 김성태, 권성동을 '탄핵 5적'이라 일컬었다. 홍준표 전 대표를 제외하고 모두 새누리당 탈당파이자 현역 의원들이다. 이들 모두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스스로 불출마 선언하거나 공천 탈락했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보내온 편지에 대해 "반가운 선물", "천금 같은 말씀"이라며 치켜세웠다. 이어서 박 전 대통령의 애국심이 가슴을 울렸고, 총선 승리를 향해 매진해 뜻에 부응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편지가 미래통합당에 약이 될지는 미지수다. 당내에서도 박 전 대통령의 옥중편지로 인해 중도층이 돌아설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선거를 앞두고 다시 새누리당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거세게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박근혜 탄핵 이전의 새누리당과 지금의 미래통합당이 어떻게 다른지 명확히 보여줘야 한다.
'국정농단'과 '박근혜 탄핵'으로 생긴 갈림길에서 새누리당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당에 머물러 자유한국당이 됐고, 다른 하나는 탄핵을 인정하고 새집을 짓자던 유승민계의 새로운보수당(새누리당→바른정당→바른미래당→새로운보수당)이 됐다. 그리고 두 정당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 많은 의석수를 챙기기 위해 하나로 통합됐다.
통합 이전에 유승민계의 '새로운보수당'이 내건 통합의 조건은 '탄핵의 강을 건너자(탄핵을 인정하고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자유한국당과 새로운보수당의 통합은 이루어졌고 탄핵의 강을 건너기로 했는지 어쨌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탄핵의 강'을 건넜는지 아닌지는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보낸 편지를 '반가운 선물'로 규정하고 받아 버렸다. 그리고 유승민은 지워졌다. 미래통합당이 된 유승민계 의원 중 일부는 공천에서 탈락했고, 공천을 받은 일부 유승민계 의원은 숨죽이며 몸을 낮추고 있다. 그동안 그렇게 '개혁'과 '새로운 보수'를 외쳐대더니 지금은 뭐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새누리당과 미래통합당의 차이점은, 전국 곳곳에 숨어있는 신천지 신도들만큼이나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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