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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희열2' 유시민, 안 될걸 알면서도 하는 이유 (gif)

current affairs/정치

by Mr. Kim_ 2019. 4. 29.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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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서 발견된 '글쓰기 재능'

1980년 5월 17일 밤, 서울대 학생회실에서 사복 경찰에게 잡힌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은 계엄군의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게 된다. 유 이사장은 합수부에서 수사받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글쓰기 재능을 발견한 곳'이라는 표현으로 대화의 분위기를 가볍게 이어가려 했지만, 이제 40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의 기억을 여전히 가슴 한편에 무겁게 지니고 있음이 감춰지지는 않았다.


몽둥이


처음 조사실에 끌려갔을 때는 진술조차 받지 않고 그냥 폭행이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부터 진술을 받기 시작했는데, 진술할 때 만큼은 폭행이 없었으므로 진술 내용을 최대한 길게 늘이며 창작으로 이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핵심 내용은 빠뜨리고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등의 잡다한 내용을 상세히 창작해 적어낸 것이 편지지 100장에 달한 날도 있었다.


"야~ 글 진짜 잘 쓰지 않냐!"

"대학생이 글을 이 정도는 써야지~"


합수부 수사국장은 유 이사장이 써낸 진술서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글을 읽으면 상황이 눈에 다 보인다는 것이다. 수사국장이 유 이사장의 유려한 문체에 감탄했던 것과는 별개로, 유 이사장은 그가 했던 악행도 고스란히 기억하는 듯했다.


"아직도 그 국장 이름을 잊지 못한다"

나쁜 사람



유 이사장은 5월 17일 밤에 합수부 수사실로 끌려와, 7월 중순이 될 때까지 가족을 만나지 못했고, 가족들은 유 이사장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7월 중순, 합수부 조사실에서 나와 관악 경찰서로 이동했을 때, 경찰서에서 첫 면회를 했다.

 

"멀쩡하니까 됐다."


유 이사장의 아버지는 아들의 몸 상태를 여기저기 확인하시고 긴말 없이 가셨다고 한다.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했던 만큼, 비슷한 사례들을 잘 알고 있었고 소식이 끊어졌던 동안, 유 이사장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까지 들었던 터라, 아들의 몸에 큰 이상이 없는 것만으로도 안도한 것이다.


운이 좋은


얼마 후, 유 이사장은 군사재판에 넘겨진다. 당시는 '비상계엄'이 내려져 있던 시기였고, '계엄법'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부쳐진 것이다. 그리고 군사재판에서 재판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몇 달 전으로 돌아가서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또 그러겠는가?"


당시 유 이사장은, 학생운동을 하면서 죽음을 가깝게 느꼈던 순간까지 경험했고 이미 두려움과 공포에 의기소침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징역을 살고 나가면 '이제는 더 이상 못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판장의 질문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한 일에 대해서 반성하고 후회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고, 이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똑같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자존심


재판 상황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아들의 대답을 듣고 이번에도 그냥 나가버렸다고 한다. 


나오긴 글렀다


그런 대답을 하고서는 풀려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건데, 가족의 예상과는 달리, 유 이사장은 '공소기각'처리 되어 풀려난다. 사실, 유 이사장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판결이 나기도 전에 이미 대구에 있는 본가로 신병 통지서가 도착해 있었다. 


"1급 갑 현역 입대"


신병 통지서를 받아 들고, 대구 50사단 신체검사장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한다. 촬영하고 돌아서는 유 이사장에게 누군가가 병역수첩을 전달했고, 그 수첩에는 아직 하지도 않은 검사 목록에 13개의 '정상' 도장이 이미 찍혀 있었고, '1급 갑 현역 입대'가 표기되어 있었다. 계엄 당국은 민주화 운동에 나선 수많은 학생을 모조리 군사재판으로 처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일부를 강제로 현역 입대시켜서 격리하는 꼼수를 썼던 것이다.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과 '항소이유서'

유시민 눈빛


유 이사장은 1984년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벌어진 외부인 집단 구타 사건,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의 주모자로 누명을 쓰고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유 이사장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1심)판결문 읽어보니까 너무 터무니가 없어서 열 받아서" 쓰게 됐다는 게, 그 유명한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이다. 이 '항소이유서'에 관한 기사가 '동아일보'에 작게 실리게 되면서 유시민이라는 인물이 전국의 젊은이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항소이유서' 중 서두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 형량의 과중함을 애소(哀訴)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중략) 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비추어 제5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 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항소이유서를 작성하는데, 3일에 걸쳐 총 10시간 가량 소요됐고, 글의 양은 200자 원고지 100장 분량으로 총 87문단에 달한다. 3일간 나누어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기 방을 포함해 아무 데서나 글을 쓸 수 없게 되어 있고, 지정된 공간에서 교도관 감시하에서만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많은 양의 글을 머릿속으로 탈고까지 마치고, 허락된 시간에 허락된 공간에서 종이에 옮기기만 한 셈이다.


옥중에서 쓴 글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됐나?

당시 유 이사장의 변호를 맡았던 인권 변호사가 '항소이유서'를 읽은 후, '혼자 보기 아깝다'며 유 이사장의 누나에게 전달했고, 유 이사장의 누나는 1심 판결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복사를 해서 법원 기자실에 배포했다. 그중에서 동아일보만 관련 기사를 작게 실었는데, 그 기사를 통해 '항소이유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더 널리 알려지게 된다.


동아일보 항소이유서



"안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하는 이유?"

"너무 못나 보이잖아, 그냥 있으면"


유 이사장은 20대 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이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나이도 젊었고, 철권통치를 하며 모든 권력을 장악했던 유신 말기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10년, 20년 더 할 사람으로 보였다.


철권통치1


철권통치2


신림동 학교에서 우리끼리 데모해봤자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고, 돌멩이 몇 개 던진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3분 동안 반독재 민주화를 외치고 잡혀가서 3년간 징역을 사는 게 현실이었다. 


철권통치3


절대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이길 수 있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못 이길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외면해 버리면, 나 자신이 너무 못나 보이고 비참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한다."


이렇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의 '존엄'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비천함과 비겁함을 느끼고 싶지 않기 위해 나서는 것이다. 유신체제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다. 단지 그런 세상에 우연히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면, 평생 자기 비하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유 이사장은 이런 생각들 때문에 학생운동의 길을 걸었고,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는 데 14년이나 걸리는 등 고생도 많이 했지만, 최소한 내 삶에 대해 비참함은 느끼지 않고 살게 됐다고 했다.


한편, 자신과는 달리 독재 정권에 맞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며 행동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승리를 믿으며 행동했던 이들은 현실을 바꾸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뭔가를 한다면, 그 일이 실패해도 옳은 삶을 살아온 그 자체에 대해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겨야만 의미가 있다 생각하며 시작한 일은 이기지 못했을 때는 그 가치가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이기는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바꾸는 것도 하나의 인생이라 생각하고, 지금까지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다고 한다.


유 이사장이 이기는 쪽으로 자신을 바꾸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고 하니까, 90년대 초에 있었던 '민중당'이라는 진보정당이 생각난다. 이 진보정당에 몸담았던 인물 중에는 꽤 알려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재오, 김문수, 김성식, 신지호, 김용태, 차명진, 박형준 등이 있다. 그리고 민중당 소속은 아니었지만,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유 이사장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도 있다. 이들을 보면, 이기는 쪽으로 자신을 바꿔도 아주 잘 되는 경우는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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